<하얀 성> <Beyaz Kale>
저자 : 오르한 파묵 / 번역 : 이난아
출판 : 민음사 / 발행 : 2011.04.29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을 언제 알게 되었던지는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고 서점이었었나,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서였나..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중학교 때 영어 과외를 하던 선생님 집에 꽂혀있었던 책 같기도 하다. 이름이 '빨강'이라니..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 제목, 그리고 강렬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책 표지는 단연 취향 저격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언젠가 꼭 정복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물론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였기 때문에, 더더욱이 나의 정복욕구가 자극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독서력'은 좀 부족한 편인데, 끈기가 부족하고 집중력이 산만하여 유독 많은 시리즈 물들을 끝까지 읽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있어, 웬만하면 단권으로 된 책들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랬기에 고작 2편으로 출판된 <내 이름은 빨강>도 부끄럽지만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들 더하여 요즘엔 시간이 없다는 핑계까지 더해져 그저 짧은 소설들만 찾아서 읽으며, 오르만 파묵의 <내 이름의 빨강>을 한참이나 미뤄놨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약 200장 되는 분량의 그의 짧은 소설 <하얀 성>을 발견하고, "그래. 이 작품을 먼저 읽고 괜찮다면 파묵의 다른 작품까지 읽어보기로 하자"라는 즉흥적으로 그럴싸한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줄거리
17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살던 젊은 학자인 '나'는 나폴리로 향하던 중에 오스만 제국 함대를 만나고 이에 사로잡히게되어, 이스탄불에서 끌려오게된다. 나는 어떻게 서라든 육체적인 노동을 최대한 적게 하는 쪽으로 배정받기 위해 자신이 여러 지식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음을 어필하였으며, 다행히 바라던 대로 일터로 가는 대신 당시 '파샤' (군 지휘관)에게 불려 가게 된다.
나는 그곳에서 '호자'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과 믿을 수 없을 만큼 닮아있는 그의 모습에 놀란다. 파샤는 그들에게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면서 멋진 불꽃놀이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후 나와 호자는 불꽃놀이를 성황리에 마쳤고, 나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나라에 귀국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파샤가 무슬림으로 개종하면 이탈리아로 보내주겠다고 하는 것도 거부하고 그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나는 호자의 노예가 된다. 파샤가 호자에게 노예 문서를 주었고, 나를 풀어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호자의 권한이라고 이야기한다. 호자는 이탈리아에서 자란 나에 대한 호기심, '나'가 알고 있는 지식을 알고 싶다는 갈망으로 그를 노예로 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며, 호자는 직접적으로 노예가 된 그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호자는 이제 '가르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연구해야 하며, 함께 찾아야 하며, 함께 걸어가야 했다."
둘의 사이가 마냥 좋지 만은 않았다. 호자는 노예의 지식을 탐내하면서도, 또 대놓고 모든 것을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조언을 받는 것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호자는 방에 틀어박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도, 노예가 먼저 관심을 보이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노예는 호자가 호자는 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배우고 싶어 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예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때면 호자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그가 기대하는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반항적이게 호자의 흥분과 의욕을 꺾으며 그가 공허함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탄불에 흑사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게 된다. 호자는 흑사병이 두렵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반대로 두려워하는 노예를 두고 나를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운다. 하지만 호기롭던 호자는 결국 본인도 흑사병이 무섭다고 인정하였고, 흑사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둘은 극적으로 머리를 맞대게 되며, 자신의 어린 시절과 과거를 공유하며 둘 사이에는 기묘한 형제애가 싹트게 된다.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듯, 흑사병이 점차 사라지자 호자는 파디샤의 총애를 받으며, 이후 황실 점성술사가 되었다. 몇 년 동안 갈망해 왔던 이상으로 파디샤와 친밀해진 호자는 의기양양했다. 이에 노예는 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일종의 질투심과 같은 혼란한 감정을 느낀다.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후 파디샤는 노예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되고, 호자에게는 노예와 함께 입궐을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 이후 파디샤의 관심은 노예로 집중된다. 노예가 가지고 있는 색다른 지식과 이국적인 이야기들은 파디샤의 주목을 받았고, 파디샤는 호자가 알고 있는 것들은 실은 노예에게서 전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호자는 무기 제작에 몰두하게 되고, 사 년 동안 노예가 호자를 대신에 궁에 드나들게 되었다.
호자의 무기는 커다란 사원 크기의 이상한 괴물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엄청나게 삐걱거렸고, 괴상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전진하는 무기였다. 안타깝게도 무기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오스만 군대는 패배한다. 그리고 사 년 동안 호자는 자취를 감춘 채, 궁에 들락거리면서 사람들의 의심을 샀던 노예는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앞둔다. 이에 호자와 노예는 서로의 신분을 바꾸어, 호자는 이탈리아에, 노예는 호자의 신분으로 이스탄불에 정착한다.
동서양이 만나는 곳. 튀르키예
오르한 파묵은 1952년 터키(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부유한 대가족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3년간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자퇴했으며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6년 후 그는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출간한다. 이후 2006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터키(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인해 (아시아대륙의 서부에 위치하며, 유럽대륙 동남부와 연결), 동양과 서양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나라이다. <하얀 성>은 오르한 파묵이 세 번째로 발간한 소설인데, 튀르키예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어 보는 나는, 이 소설에서 보이는 동서양의 대비, 대립, 그러면서 동시에 교화되는 모습에서 이 작품 자체가 '튀르키예'와 같이 문화적 교류의 장소가 되어 다채로운 색채들이 매력적이고 신비롭게 발산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 소설에서 파묵은 이 세계의 역사는 동양이 서양이 되고 서양이 동양이 되는, 즉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만 하고 또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암묵적으로 항변하는지도 모른다. 파묵은 자신이 동야인인지 또는 서양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인 '분신' 모티프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반된 문화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닮은꼴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동양인이나 서양인이기 전에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서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좋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호기심을 느끼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또한 상대방도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서로가 자신이 길러지지 않은 환경에 정착하면서 살게 된 결말까지 인상 깊었다.
나 또한 현재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곳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활 중인데, (서양 국가는 아니지만)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도 하고, 나와 다른 것에 불편해하기도 했다가, 결국에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것이 통감하기도 하는데, 나의 모습이 바로 이 소설 속의 호자와 노예의 모습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 혹은 미지에 준하는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면 달리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마르셀 프루스트 (Y.K 카라오스만오울루의 번역본에서)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고, 읽을 책도 많다.
이 소설을 통해, 오르만 파묵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더욱 기대가 되게 되었으며, 신기하게도 다녀왔던 사람마다 인상적이었다고 하던,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더 궁금해졌다. 근데 이번 년에 유독 튀르키예즈와 인연이 있는 듯한 기분은 내가 너무 과하게 끼워 맞추는 것일까?
2023년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1~2위를 다툴 것 같은 영화 <3000년의 기다림>에서도 튀르키예즈가 등장한다. 영화는 문학학자인 알리테아 비니(틸다 스윈튼)가 특이한 소용돌이 모양을 한 파란색 병 안의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를 깨우게 되며 일어나는 일을 그리는데, 비니가 그 병을 구입한 곳이 다름 아니라 튀르키예즈 이스탄불의 한 골동품 가게였다. 최근에까지 이 영화의 ost를 듣던 나는 <하얀 성>을 읽으면서도 그 음악들을 들었고 내 독서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이번 연도에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카이막'을 꼽을 것인데,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 맛이 너무 궁금했던 카이막을 한국에서 먹고 그가 '천상의 맛'이라고 했던 표현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실감했었다.
게다가 <하얀 성>까지 읽고 나니 튀르키예가 갑자기 굉장히 내적으로 친밀한 나라로 다가오며, 마치 튀르키예를 잘 알고 있는 듯 오지랖까지 부릴 수도 있을 거 같다. 영화, 책, 음식들 통해서 튀르키예의 문화를 간접적으로라도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새삼 감사하게 된다. 언젠간 튀르키예에 가면, 이 모든 것들을 알기 전보다 좀 더 그곳을 깊이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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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들. 헤르만 헤세 <데미안>,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알베르 카뮈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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