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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Woman in the Dunes . 영화로 보고 책으로읽기.

by evelyn_ 2019.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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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는 고등학교 일 학년때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발견한 책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기적으로 학교 도서관에 가서 자기가 읽고 싶어하는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당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의 제목과 표지의 그림에 이끌려서 읽게 되었다. 사구 같기도 하고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 같기도한 매력적인 표지의 그림. 모래가 주는 따뜻하면서도 황량한 느낌. 가보지 못한 미지의 환경에 대한 호기심.. 특히나 당시 조향사가 되고싶었어서 여러 향수의 향을 맡아보고 알아가는 것에 집착하던 때였는데, 디올의 <Dune>을 시향했을 때의 그 특이하고 강렬했던 인상이 사막에 대한 뭔지 모를 호기심을 만들었었는데 이러한 복합적인 매력들에 이끌려 이 책을 본능적으로 집었었던 듯하다. 

 

 시간이 지나고 내용은 잊혀져도 당시 강력하게 이끌렸었던 느낌이 한참 동안이나 남아서 문득 문득 생각이 나다가 최근 마음먹고 다시 읽어보자 하며 서점에 가서 이 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표지가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 반가웠었다. 이후 책을 원작으로한 동명의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곤충 채집을 하려고 사막으로 떠난 교사인 주인공은 돌아가는 차편을 놓치게 되어서 어느 여자가 거주하는 사막의 어느 모래 구멍 속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다음 날 그는 자신이 여자를 도와줄 사람으로 유인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여자는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히지 않도록 매일 밤마다 삽질을 해야했는데 그 일은 여자 혼자하기에 버거웠기에 주인공이 필요했던 것이다. 

 

 퍼낸 모래들은 그녀의 집이 무너지지 않게끔 해주고 그 모래들은 구멍 위로 올려지고 도시로 팔려진다. 그 노동의 대가로 그녀는 마을사람들이 구멍 위에서 전달하는 물과 음식을 받아 생을 유지한다. 그녀의 집이 무너지면 연이어 다른 집들에도 피해가 간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여자는 자기 혼자서 그곳 생활을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지만 도망치려 하지않는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그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들의 뼈가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는 그 구멍에서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갖은 시도를 하고 결국에 가까스로 도망나오게 되지만 마을사람들에게 잡히게 되어서 다시 구멍으로 돌려보내지게 된다. 하지만 남자는 이에 포기하지않고 또 다른 기회를 옅보다 우연히 모래를 이용하여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수 장치를 만들게 되고, 그 이후 도망갈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 모래 구멍에서 살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곤충 채집을 하러 떠났던 주인공은 오히려 자기가 모래구멍의 삶에 채집되어졌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그 구멍에 남기로 결정한다 . 이 작품을 통해 자신에게 둘러싸인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쉽지 않고, 오히려 그 환경에 쉽게 순응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 모래를 퍼내는 노동도 어느 순간 목마름을 해소할 물을 얻기위해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그 생활에 익숙해지고 순응하게 되어 그가 탈출에 포기했다는 그의 소시민적인 결정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 것이 바로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포기한 우리들의 삶에 대한 단면이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와 책을 보고난 후 이 작품을 더 이해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여 여러 리뷰를 찾아보고 나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되었다.

 

 “실존 주의” 

“실존 주의”라는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그 개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실존주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개념이 이 작품에 대한 해석 중에 가장 인상적인 해석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자신이 너무나 벗어나고 싶어했던 모래 구멍 속 일상에 결국에 머물러 있는 것을 선택한 주인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노동을 통해 배급받은 물과 음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힘든 노동을 견뎌낼 수 있는 술과 담배도 제공받으면서 그 삶에 오히려 중독되어 도망쳐 나오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그렇게 나도 모르게 부당한 상황에서 판단력을 잃고 습관 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경계가 이 책이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사막 구멍속 마을에 남겨진 그의 삶이 불행했다고 섣불리 단정지어 버렸던 사실을 “실존 주의”라는 단어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가 사막에 남겨져서 불행했을지 행복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 이후의 삶이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 모래 구멍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했지만, 어찌됐든 그 포기의 행위 자체에 주인공의 “의지”가 담겨 있었음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그의 삶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도출된다. 그는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머무름”을 “선택”했다. '행복했다' 아니면 '불행했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가 그의 인생을 선택한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그의 인생과 생활을 자각적으로 직접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을 더 이상 부적절한 환경에 순응해버린 나약한 사람으로 표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같이 모래를 퍼내는 삶이 힘들지만 주인공이 원래 거주했던 지상의 삶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모래 구멍보다 더 삶이 치열하고 지옥같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나 여자나 둘 다 노동과 억압이라는 덫에 갇혔다. 하지만 어느 삶의 무게가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을까? 삶을 저울에 올려서 비교 해볼 수 있겠냐만은 모래 구멍 밖 지상에 사는 도시인의 하루하루도 모래 구덩이 속 삶과 비교했을 때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각자의 삶은 상대적이며 어느 누구도 그 가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모래의 여자> 데시가하라 히로시가 감독 1964년

 <모래의 여자> 책 VS 영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1962년 출판되었다. 출판 후 영어, 체코어, 핀란드어, 덴마크어, 러시아어 등 수십 개 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1963년에 제 14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1968년에 프랑스에서 최우수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보니 머릿속에 장면 장면이 더 빠르게 연상되는 점이 좋았지만, 역시나 책은 영화보다도 더욱 세세한 감정들을 느낄 수가 있게했다. 1인칭 시점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인지 주인공의 내면의 소리를 디테일하게 알 수 있어서 영화 속에서는 큰 따옴표로 표현되지만 그 내면에 숨은 작은 따옴표들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을 다방면으로 입체적이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나 주인공이 곤충 채집을 떠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재밌었다. 
 
“그는 이번 휴가에 대해서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고, 동료중 누구에게도 일부러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그저 말을 안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수께끼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잿빛 일상에 피부색까지 물들어 가고 이쓴 그들을 약올리기에는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었다.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주인공은 자신이 곤충 채집을 위해 휴가를 떠나는 것이 굉장히 즐거웠던 것 같다. 본인이 즐거웠기 때문에 이러한 즐거운 감정을 동료들이 알면 그들이 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부족하여서 자신의 휴가 자체를 수수께끼처럼 보이게 해서 더욱 자신이 신비한 곳으로 떠난다는 것을 은근하게 알리고 싶어했다.  휴가를 떠나는 자가 느끼는 행복한 감정 그리고 그 행복한 감정이 우월감으로까지 확장된 것이 흥미로웠고, 그렇게 행복하게 떠났던 주인공이 모래의 삶에 갇히게 된 것이 (혹은 갇힘을 택한 것이) 더욱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1964년 작품이다. 히로시 테시가하라 감독이 영화화 하였는데 각본은 아베코보가 만들었다고 한다. 원작 소설의 작가가 영화의 각본을 써서 그런지 영화는 정말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영상으로 풀어낸 것처럼 느껴진다. <모래의 여자> 영화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 두 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다음 해 일본 마이니치 필름 콩쿨 4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등 세계가 주목한 영화였다고 한다. 

 

 흑백 작품인데 “오래된 작품이라서 흑백이다”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감독이 내용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흑백을 “선택”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는 흑백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현악기의 소리는 주인공 내면의 갈등 여자 및 마을사람들과의 갈등들을 긴장감있게 잘 전달해준다. 책을 보고난 뒤에 영화를 보면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고 책을 보았더니 영화가 얼마나 책의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그는 곤충채집에 대한 기대도 컸을 것이지만 동료들을 약올리기 위해서 휴가를 떠났기도 하다. 그러한 감정이 이 책의 가장 첫 표지에 써있는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문구와 상응된다. 동료를 약올리기 위해 , 도시에 삶에 지쳤기에 그 일상에서 도망쳤던 주인공. 하지만 그렇게 도망친 그는 또 다른 벌들을 마주친다. 모래구멍과 여자라는 이름의 벌. 그 벌들에게서 그는 또 도망치고 싶었다. 아이너리하게도 그가 다시 미치도록 도망치고 싶은 곳은 그가 애초에 도망쳐온 도시의 삶이다. 

 

 

 하지만 그는 유수장치에서 모래 구멍 속의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지상의 생활에 흥미가 없어졌다. 따라서 여자가 자리를 비운사이 모래구덩이를 벗어날 수 있는 사다리가 그를 내려져있었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를 쫓는 벌 따위는 없어졌다. 그는 자신이 곤충 채집에게 흥미를 느꼈던 만큼 유수장치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모래구멍의 삶을 선택한다.  잡는 사람이 없으니 도망칠 재미가 없어진 주인공. 쫓는 벌이 없는 삶. 도망칠 “재미”를 잃은 삶. 그래서 남겨지는 삶을 선택한 그는 과연 행복 했을까. 불행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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