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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를 10년 만에 다시보다. 케이트 윈슬렛, 랄프 파인즈 주연.

by evelyn_ 2019.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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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케이트 윈슬렛 (한나 역), 랄프 파인즈 (마이클 역), 데이빗  크로스 (어린 마이클 역)

-러닝타임 :123분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는 많이 알려져있다시피,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가의 원작 책과 그 책을 원작으로 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가 있다. 나는 2009년에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은 다음에 그 영화를 원작으로한 영화를 보는 것을 꺼려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되었던 자신만의 이미지가 영화로는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이유일텐데 실은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 되면서 원작책의 스토리라인과 감동을 구현해내지 못했었고, 거기서 발생한 실망감들이 그들을 그렇게 꺼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원작인 책과 그 책을 바탕으로한 영화를 함께 쌍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상상하였던 이미지들이 스크린을 통해서 좀 더 구체화되고 다양해지고 풍부해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이미지하고는 다르게 스크린에서 표현이 되더라도, 싫다기 보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스크린의 이미지가 더해져서 그 느낌 또한 더해지는 것 같아서, 기본적으로 책을 읽은 다음에 영화를 보는 것을 매우 선호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책을 원작으로한 영화를 즐겨보는데, 기본적으로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각본이 튼튼하여 좋은 영화일 확률이 높다는 나의 믿음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당시 이러한 믿음으로 접하게 되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책도 보고 영화도 봤던 작품인데도, 분명 인상 깊었다고 기억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 그 스토리 라인과 그 인상깊었던 포인트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허무했다. 그 허무함과 아쉬움 그리고 궁금함이 약 10년이 지난 후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다시 본 영화에 대한 솔직한 심정은 ‘답답함’이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이야기만 했어도 한나는 무기징역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한나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죽어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서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마이클도 재판이 끝날 때까지 고민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녀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을 지키도록 침묵을 어렵게 택한다. 한나의 대한 어린 시절의 사랑으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제대로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마이클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녀를 도와주고 싶지만 도와줄 수 없는 마이클을 보면서도 답답하였다. 이렇게 어긋나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까지 매정했어야 했을까. 그 이전에 마이클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던 한나는 자신이 떠난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렸다.  (어찌보면 쪽지 하나라도 남길 수 있었을텐데 싶지만 문맹이었던 한나는 작은 쪽지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실은 그녀가 남기고 싶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 그녀의 그런 단호한 결정에 대한 응원보다는 마이클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은 감히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그녀의 선택이 더욱 매정하게 느껴졌다. 

 

 글을 알아야만 사유할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의 감시자였던 한나는 재판에서 자신은 감시관으로서 홀로코스트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발언은 순수했으며 동시에 경악스러웠다. 글을 안다는 것과 사유한다는 것에는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글을 아는 마이클은 법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한나는 어쩌다보니 이끌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관리자를 맡게되고, 재판에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행동을 너무나 순수하게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글은 개개인을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면서, 사유하지 못한 개인은 어떤 부당한 강압적인 압력에서 억지로 행하는 행위들 조차도 맞는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까? 작가는 사유하지 못하는 개인을 표현하기위해 문맹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설정했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는 타당한 장치일까?

 

 이후 감옥에서 생활하면서 마이클이 녹음하여서 보내준 오디오를 들으면서 한나는 혼자서 글을 깨우치게 되고, 사면 하기 전날 마이클을 만난 이후에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글을 깨우치고 나서 한나는 자신의 행동들이 얼마나 그릇되었었는지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살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20년 만에 마주친 마이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그녀 자살로 이끌었을까. 그녀도 괴로웠지만 자신을 이해해줄 마이클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면 직전 만난 마이클은 사유함으로 성장한 어른으로써 어렸을 때의 순수한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나는 더욱 자신이 없었던 것 아닐까. 이 세상을 버티며 살아갈 자신이. 어찌보면 속죄를 위한 자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나가 저지른 일은 용서가 될 수 없는 일인 것은 이후 미국에서 만난 유대인 딸과 마이클과의 대화에서도 다시 한번 명확하게 규정된다. 

 

 마이클은 자신이 재판에서 침묵을 지킴으로 한나를 지킴과 동시에 한나를 포기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죄책감과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책을 녹음하여서 한나에게 보냈을 것이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녹음 테이프를 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받아드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한나는 세상사람들에게 죄인이 분명했으므로. 녹음테이프의 목적이 어떠하였던지간에, 한나는 마이클이 보내온 녹음 테이프들로 글을 깨우치게되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사유하며 얼마나 자신이 큰 죄를 저지렀는지 뼈아프게 깨달아 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녹음 테이프를 보내면서 한나가 사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아님 단지 그녀를 구해주지 못한 죄책감과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기만을 바랬을까.  

 
 그리고, 한나 아렌트와 한나 슈미츠.

 

 

극중 “한나 슈미츠”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와 “아우슈비츠”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의 개념은 은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사람들은 정말로 확고하게 유대인들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그 잔혹한 행위에 동참했던 것이 아니라, 알고보면 정말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법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인데, 간단하게 말해서, 강압적인 명령이 주어졌을때 거부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뜻하는 개념으로, 다만 오해하기 쉬운게 그렇기때문에 그 악한 행위들을 용서하는 개념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에 이끌려 악한 행위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길러야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한나 슈미츠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유하지 못하고 악의 평범성에 이끌린 대표적인 케이스일 것이다. 한나가 아무리 자신이 “그럴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해도 그녀가 잘못한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녀는 재판에 소환되기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한나는 마이클이 책을 읽어줄 때 어떤 이야기들에 감동을 받아 울기도 한다. 그 부분에서 한나는 어린아이같은 순수하며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한나는 누군가를 공감할만한 감정은 있었으나 사유하지 못했던 것일까? 감정이 풍부한 것은 어찌보면 상대방의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도 같다. 하지만 한나는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서만 그치면 안되었다. 그녀는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순수함은 연약함으로 귀결되며 사유하지 못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궁금해진다. 그녀는 사유하기 위해서 글을 배웠을까. 아니면 단지 마이클과 대화하기 위해서 배웠었던 것일까. 한나가 자살직전 마지막에 남긴 유대인의 딸을 위한 편지를 생각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었을수도 있으며, 마이클에게 못다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수도 있다. 실은 정확하게 모르겠다. 하지만 정확히 모르겠는 지금 이 감정이 여운이 되어 남는다.  과연 내가 한나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설령 내가 과연 글을 알고 사유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관리자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충분하게 사유하고 있는가. 나는 깨어있는 것일까. 나는 의식적으로 살고있는가 라는 생각과 이에 대한 경각심이 따라온다. 

 

 


더하자면 왜 이 영화를 인상깊게 보았어도 기억이 안 났었냐면 일단 어느 기록으로도 책과 영화의 내용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스타그램이던지 페이스북이던지 짧게라도 내용을 기록해두었던 작품들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내게 10년 전 당시 인상이 깊게 남았었지만 그 이후에 그 내용들을 기록하지 않았어서 까먹어버렸던 것 같다. 앞으로 더 부지런히 기록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당시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내 자신이 부족했었다는것도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그저 한나와 마이클의 안타까운 사랑에 대해서만 마음 아파하고 그쳤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충분하게 느끼지 못했었고 그랬으니까 마음에 깊이 남지 않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영화가 너무나도 섬세하게 우리에게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짜여있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그냥 안타까운 타이밍 맞지 않았던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다. (내가 10년전에 느꼈던대로) 어느 누구는 예술과 외설과의 경계에서 이 작품을 논하고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정도의 리뷰로 규정될 수 있을만큼 가볍지가 않았다.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에 대한 개념을 알고서 이 작품을 다시 접할 수 있게 되어서 진정으로 너무 좋았다. 10년만에 다시 보는 영화에서도 이렇게 다시 느끼는 바가 많은데, 하물며 책은 어떨까. 책도 다시 읽어보고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봤던 여러 작품을 다시 보고 다시 느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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